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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여행) 부여 낙화암에서 의자왕의 궁녀들을 생각하며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 때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침공을 당하자 궁녀들은 부소산성까지 피난하였습니다. 연합군이 부여의 부소산성까지 밀려 오자 의자왕의 궁녀들은 치욕을 피하려 낙화암에서 죽음을 택했습니다. 궁녀 3,000명이 떨어져는 모습이 꽃과 같다고 하여 낙화암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실 3,000명이란 궁녀의 숫자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화려했던 백제의 역사를 정복자의 입장에서 비하하려고 의도적으로 과장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부여의 낙화암은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부소산에는 부소산성이 있으며 이 성을 지나면 가파른 좁은 길을 지나면 위태로운 자리에 삼 천 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져 생을 마쳤다는 슬픈 절벽입니다.

  

충남 여행의 또다른 맛은 부여의 부소산성 입구에는 아직도 70년대식 쯤 되어 보이는 상점입니다.

 

낙화암으로 가는 길은 아직은 편안했습니다.

 

낙화암으로 가는 길에 반월정(半月亭)이 있어 부여 시내와 백마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소산성의 반월정

 

반월정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반월정에서 내려다 본 부여 시내와 백마강

 

이 곳이 부소산성입니다.

안내자가 알려 주지 않으면 부소산성인 줄 알아 차리지 못합니다.

부소산성은 흙으로 구축된 산성이어서얼듯 보아서는

산성이라 하기는 어려울 듯 믿믿합니다. 

 

궁녀들이 생을 마감하려고 울면서 급하게 올랐을 험한 바위 길

 

1929년 부여군수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습니다. 백(百)은 숫자로는 100이지만 의역하면 많다는 의미입니다. 꽃다운 궁녀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낙화암과 백마강을 함축하는 이름이겠죠. 이 정자는 1984년에는 충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의자왕의 궁녀들이 사라진 자리에 화정을 지어 그 날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백화정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어쨌든 충남 여행 중에 방문한 낙화암은 국가의 운명에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그에 따른 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일신이 위기에 처했더라도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정절을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긴 궁녀들의 슬픈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백마강은 오늘도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내려다 본 강물은 절벽이 깊고 또한 강물도 깊어 공포스럽고 아찔하다.  

 

현대식 유람선이 백마강을 지나고 있다.

 

황포 돛단배도 때를 맞춰 꾸준하게 뱃놀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그 때의 비극을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유람객들은 편안하다.

 

 

 

오늘도 3의자왕의 3,000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백화정에는 충남 여행을 하러 온 세계 최강의 대한민국 아줌마들과 그들의 절친 아저씨들이 부지런히 찾아 옵니다.

그분들은 옛 비극을 잊은 채 왁자한 말들을 남기며 사진 몇 장을 추억으로 담으려 바쁘게 포즈를 취합니다.

 

 

한동안 백제 의자왕과 삼 천 궁녀들을 생각해 봅니다. 국가가 백성들의 안위에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슬픈 낙화암 위의 백화정과 백마강을 뒤로하고 돌아가려니 백제 근초고왕이 중국의 산동반도와 양쯔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대륙을 지배하던 백제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부소산성의 소나무 뿌리가 강력하고 끈질긴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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